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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강변에서 ‘밤마실’을 즐겨 보셨는가? 여태 모르고 있었다. 햇볕 따뜻하게 드는 이 동네의 밤 풍경이 이렇게 멋스러운지. 낮에만 여러 번 보고 떠났던 밀양이 아니던가.“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면 돼요”라는 영화(짐 캐리 주연의 ‘예스맨’) 명대사처럼 산을 찾아온 필자는 처음으로 밀양에서 하루를 묵었다. 영남알프스 산행을 끝내고 내려와 햇볕이 물러가고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버스를 타고 밀양교로 향했다. 밀양의 얼굴 영남루(嶺南樓) 야경을 즐기기 위해서다. 영남루는 밀양강변에 풍채 좋게 우뚝 솟아 있다.조선 후기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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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4.02.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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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용주사는 흥미로운 사찰이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기리는 위패를 모신 왕실 사찰인 것.여기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 가지 사연이 더 있다.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인 조지훈(1920~1968)이 이 절에서 그 유명한 ‘승무(僧舞)’라는 명시를 탄생시켰다.용주사 한 켠에 돌로 된 ‘승무’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글씨가 흐릿하여 보지 못하고 놓치는 방문객들이 많다.궁금해서 조지훈의 책(1959년에 쓴 ‘시의 원리’)을 찾아봤더니 당시 용주사에서 비구니승의 승무를 본 감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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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4.01.16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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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도 저 평온한 물줄기와 같다면. 전남 구례 땅, 해발 530미터 오산(鼇山)의 품에 안긴 사성암(四聖庵)에서 섬진강을 굽어보았다. 너무 멀리서 바라보면 강물의 호흡을 느낄 수 없고,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강물의 유장미를 느낄 수 없으니 이 지점이 제격인 듯 싶다. 노자의 ‘도덕경’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어지는 문장은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좋게, 또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노자의 말이 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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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12.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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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원주, 하동. 이 세 곳을 모두 둘러봐야만 소설가 박경리(1927~2008)의 삶을 10분의 1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고향인 경남 통영엔 박경리기념관과 묘소가, △옛집이 있는 강원 원주엔 박경리 문학공원(문학의집)이, △대표작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엔 최참판댁과 너른 평사리 들판, 그리고 박경리문학관이 있으니 말이다.일찌감치 세 동네를 찾았지만 뒤늦게나마 철 지난 부고(訃告) 삼아 위대한 소설가의 삶에 대해 몇 글자 보탠다.소설 ‘토지’ 속에서 월선이와 용이 아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섬진강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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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12.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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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 대정. 과거를 되돌아보면, 추사 김정희가 유배와 긴 세월을 보냈던 곳. 대정읍에 그의 유배 적소를 재현해 놓았다. 최근으로 보자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이 남방큰돌고래를 만나 환호했던 곳. 운이 좋으면 대정 해변에서 돌고래 무리들의 유영을 볼 수도 있다.중년의 객에겐 트래킹으로 피곤해 진 몸을 달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대정읍의 조그만 양조장 ‘이시보’ 막걸리로 달려갔다. 세 번 놀랐다. 술을 빚는 사람이 30대 초반 청년이어서 먼저 놀랐고, 양조장 규모가 너무 작아서 재차 놀랐고, 시음 후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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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11.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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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이들의 공통점은? 서울 광화문에서 보자면, 한반도의 가장 남쪽 땅인 ‘정남진’ 장흥이 낳은 문인들이다. 때마침 장흥 가는 길에, 진목마을에 있는 이청준의 생가를 들렀다.골목 어귀 벽에 ‘미백 이청준 생가’라고 적혀 있다. 생가 마당에 서니 마치 용이 비늘을 벗어놓은 듯 하늘에 박힌 구름이 무척 아름다웠다.미백(未白). 이청준이 지은 아호다. 나이든 어머니보다 먼저 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그는 그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다고 한다. 그의 수필 작호기(作號記)에서 연유를 읽을 수 있다.“절하지 말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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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11.1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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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저항의 역사인 동시에 변절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북 군산 출신의 소설가 백릉(白菱) 채만식(1902~1950)은 그런 저항과 변절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지식인이었다.‘레디메이드 인생’. ‘태평천하’. ‘탁류’ 등의 세태 풍자 작품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건 그에게 ‘명예’였지만, 잘못 발을 들여놓은 친일의 이력은 두고두고 ‘멍에’가 됐다.군산 금강하구둑 인근에 채만식 문학관이 들어선 건 2001년 3월이다. 친일 문학인 42인,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는 등 친일 딱지가 붙은 채만식이었지만, 지역민들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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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8.0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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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과 함안을 가로지르는 남강에 심상찮게 생긴 바위 하나가 떠있다. 솥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솥바위, 물에 잠긴 부분이 3개의 솥 다리 형상이라 하여 정암(鼎巖)이라 부른다. 조선조 말, 한 도사가 솥바위 주변 20리(약 8㎞)에 큰 부자 셋이 나온다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예언 탓인지 실제로 의령에선 삼성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이, 남쪽 진주에선 LG 창업주 연암(蓮庵) 구인회가, 그리고 동남쪽 함안에선 효성 창업주 만우(晩愚) 조홍제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후 솥바위를 부자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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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7.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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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말을 했다.“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라.”천천히 가야 멀리 간다는 뜻으로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는 명구로 잘 알려져 있다. 소의 걸음(牛步) 또한 그러하다. 우보천리(牛步千里). 소는 비록 느리게 걷지만 우직하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결국에는 천 리를 간다.섬 속의 섬, 제주 우도에선 그런 우보천리를 마음에 새기면서 섬 전체를 돌아도 훌륭한 힐링이 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소가 드러누운 것 같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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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6.3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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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월 선생님, 눈이 오는 날 시집을 보내게 되어 마음이 한결 흐뭇합니다.”1977년 새해 첫 날, 오랫동안 한양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인 박목월(1916~1978)에게 세배 인사를 겸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원고지에 편짓글을 적어 보낸 이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막동리에 사는 서른한 살의 나태주였다. 훗날 ‘풀꽃’(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이라는 시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그 나태주 시인이다.편지에 따르면, 시인은 새 시집을 상재(上梓)하곤 스승에게 보냈던 모양이다. 박목월 역시 그 무렵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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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5.3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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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도 크지도 않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저 멀리 외딴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단박에 ‘아~저 집이구나’라고 알아챘다. 서울살이에 지친 혜원(김태리 분)이 고향에 내려와 살며 봄, 여름, 가을, 겨울 해가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그 집이다.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는 촬영지였던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美城里)를 그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다. 일본 원작자의 리메이크 판권을 구입해 만든 영화지만, 임순례 감독은 일본판(2015)보다 미적인 분위기를 훨씬 더 잘 살려냈다.전국을 ‘이 잡듯’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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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5.0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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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보면 의외의 공간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는 곳이 종종 있다. 이를테면,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고분군(古墳群) 같은 곳. 명산 팔공산의 발뒤꿈치쯤 되는 구릉 지대에 크고 작은 옛 무덤 210여 기가 밀집, 형성되어 있다.규모도 엄청나다. 31만2239㎡, 평으로 환산하면 약 9만5천 평. 5~6세기경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지역 토착세력의 집단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여기는 마치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힐링시켜주는 곳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무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먼 시간 속의 세계로 빨려들어 가는 건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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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4.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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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선 뭘 먹어야 해?”“빛고을에 왔으면 송정떡갈비지. 광주 5미(송정떡갈비, 한정식, 오리탕, 무등산 보리밥, 김치) 중 하나야.”“오~ 그래.”“다른 곳과 달리 여기선 떡갈비를 돼지고기랑 소고기랑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다고 해.”광주광역시에 들를 때면 이곳에 살던 대학 친구를 따라 송정떡갈비를 먹으러 가곤 했다. 광주 송정역에서 지척이다. 20여 개의 전문식당이 먹자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골목길에 접어들면 고소한 냄새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떡갈비와 함께 나오는 뼈국물도 일품. 돼지 등뼈를 무와 함께 끓여서 내는데 떡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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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4.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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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은 향기가 그윽한 곳이다. 편백나무숲으로 유명한 축령산을 품고 있어 편백 향기가 그윽한 것이 그 첫째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동방 18현)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신 필암서원이 있어 학문의 향기가 그윽한 것이 그 둘째다.이런 향기에 코만 즐거운 게 아니다. 장성역에 내리면 눈까지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역 건물도, 지나가는 버스도, 공공시설도 모두 노란색. 꽃도 노란색 위주로 심어져 있다.장성군은 2014년 전국 최초로 컬러 마케팅을 도입했다. ‘옐로우 시티’를 표방한 것. ‘옐로우 시티’라는 특허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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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4.0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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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교회라고?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몸을 빼는 순간, 눈앞에 믿기지 않는 건축물이 동공에 빨려 들어왔다.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거기엔 세계적 건축 거장인 재일교포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 1937~2011)이 마법을 부려 놓은 방주교회가 있다.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했단다.또 다른 거장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비교해 보면 닮은듯 다르다. 안도 다다오가 교회 벽면에 십자가 모양을 파내고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빛의 교회’를 만들었다면, 이타미 준은 주위에 인공 수조들을 파서 교회가 물 위에 둥둥 뜨는 느낌이 들도록 ‘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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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3.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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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시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말을 걸었다. 시인은 자꾸만 말이 없다. 돌아서며 다시 그리운듯 바라보았다.경남 사천(삼천포) 노산공원의 박재삼 문학관. 삼천포가 키워낸 박재삼(1933~1997) 시인은 밤에도, 아침에도 자꾸만 말이 없다.두 물줄기가 합수(合水)를 이루듯, 두 개의 땅 사천과 삼천포가 만나 서로 몸을 섞어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그곳은 시인 어머니의 고향이랬다지. 생전에 노산공원에 올라 멍하니 사색하고 시공부를 했다지.그런 시인은 죽어서도 여전히 거기 앉아있다.서정과 한(恨)의 우물을 깊게 팠던 시인. 때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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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기자
2023.03.20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