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삼악산의 정상 용화봉. 그리 높지 않지만 오르기엔 만만찮다.
춘천 삼악산의 정상 용화봉. 그리 높지 않지만 오르기엔 만만찮다.
삼악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삼악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작년 이맘때 이성부 시인의 삶과 산 이야기를 쓰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는 시인의 <봄> 시를 마지막에 인용했었다. 시인의 말처럼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봄이 지척에 와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번씩 자리바꿈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계절이지만 늘 봄인 곳이 있다. 춘천(春川)이다. 고려 시대 이후 춘주(春州), 춘성(春城)으로 달리 불렸지만 봄(春)이라는 글자만큼은 악착같이 붙들고 있다. 
 
그 춘천에 석파령(席破嶺)이 있다. 조선 시대 한양에서 춘천으로 가던 관문이었던 석파령은 삼악산 북쪽 능선에서 이어지는 고개로, 옛날부터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조선 광해군 시절,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이란 이가 석파령에서 혼쭐이 났던 모양이다. (정철, 박인로,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신흠은 인목대비 폐비사건으로 춘천으로 유배 왔을 때 집필한 ‘춘성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석파령에 이르렀을 때 그 험준함에 겁을 먹은 나머지 말을 놓아두고 걸어갔는데 바로 아래 낭떠러지를 보고 무척이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신흠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석파령 옛길은 이제 ‘석파령 너미길’로 이름 붙여졌다. 석파령은 춘천 서면 당림리와 덕두원리를 구분 짓는 이정표인데, 당림리~석파령~덕두원리~수레너미길~장절공 신숭겸 묘까지 18.7㎞를 ‘석파령 너미길’로 조성해 놓았다. 

 

석파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
석파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
석파령 옛길은 봄이 되면 걷기에 좋은 구간이다.
석파령 옛길은 봄이 되면 걷기에 좋은 구간이다.

 

필자는 춘천의 진산인 삼악산 산행 후 석파령으로 내려가 신숭겸 묘소까지 13km를 더 걷기로 했다. 강촌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의암댐 삼악산 매표소 입구에 내렸다. 삼악산은 2천 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돈을 내면 같은 금액의 춘천사랑상품권으로 바꿔준다. 산행 후 춘천 경제를 위해 쓰고 가라는 얘기다(필자 역시 남춘천역 식당에서 사용했다).

오랫동안 걷고 싶었던 석파령 옛길이기에 마음은 새털처럼 팔락거렸고, 발길은 솜털 위를 걷는 듯했다. 2월 중순, 아직 산엔 눈이 수북이 쌓였지만 날씨는 쾌청했다. 

삼악산(三岳山, 해발 654m)은 정상 용화봉, 청운봉, 등선봉 세 봉우리를 말한다. 700미터가 채 안 되지만 평지가 없는 급경사에 릿지(암릉) 구간이 길게 펼쳐져 있어 산행이 만만찮다. 코가 바위에 닿을 듯 두 손 두 발로 짐승처럼 기어 올라가야 하지만, 그 짜릿함이 사람들을 이 산으로 자주 불러들이곤 한다. 

 

삼악산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두름산 전경.
삼악산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두름산 전경.

 

필자도 처음엔 그 옹골찬 자태에 자못 놀랐지만 서너 차례 오면서 삼악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한마디로 삼악산은 작지만 웅장한 산이다. 

산을 조금 오르다 보면 눈앞에 나타나는 의암호와 건너편 두름산 전경이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붕어섬은 마치 살아있는 붕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 오를 듯 퍼득임으로 다가온다. 수고스러움 없이 손쉽게 산을 만끽할 수도 있다. 2021년에 3.6㎞ 국내 최장 ‘삼악산 호수 케이블카’가 개통되면서부터다. 

쉬지 않고 치고 올라간 탓에 정상 용화봉에 다다르니 기진맥진. 숨을 고르고 본격적으로 석파령으로 향했다. 초행길, 청운봉을 넘어 석파령까지 인적 없는 능선길을 걷고 또 걸었다. 눈길에 간혹 고라니인지 멧돼지인지 짐승 발자국만 발견했을 뿐. 

 

삼악산이 그 옛날 중요한 군사지역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삼악산성지 표지판.
삼악산이 그 옛날 중요한 군사지역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삼악산성지 표지판.

 

중간에 ‘삼악산성’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났다. 후삼국 시대 궁예가 철원에서 왕건에게 쫓겨 삼악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능선을 따라 5km가량 산성 흔적이 남아있다. 삼악산과 석파령은 다산 정약용에게도 특별한 산이었다. 이런 삼악시(三嶽詩)를 남겼다. 

까마득한 석파령은(崔崔席破嶺) 
삼악산의 자락(是蓋三嶽餘)
고운 봉우리는 없지만(雖無娟妙峯)
방어엔 자못 허술하지 않네(捍禦頗不踈)

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에서 만년을 보내던 다산은 물길로 춘천을 두 차례 찾았다. 1820년과 1823년이다. 그의 춘천 방문 내용은 다산시문집 ‘산행일기’(汕行日記)에 나온다. 

<경진년(1820년 순조 20) 봄 3월 24일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중(峽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나도 따라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여러 시를 지었다.>
 
정약용이 언급한 선백씨(先伯氏)는 이복 맏형인 정약현을 말한다. 아버지 정재원과 첫 부인 의령남씨의 소생이 정약현이다.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윤씨는 둘째 부인으로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를 낳았다.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에서 학순(學淳)은 정약현의 아들이다. 풀이하자면 정약용이 맏형 정약현의 아들, 즉 조카 정학순이 춘천(춘주) 출신 아내를 맞이할 때 춘천에 함께 따라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산행일기’ 내용을 보자. 

 <그 후 3년이 지나 계미년(1823년 순조 23) 여름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大林)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역시 작은 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내가 또 따라갔으니...>

정약용은 이번에도 혼인 때문에 춘천을 찾았다. 손자(큰아들 학연의 장남 대림)가 아내를 맞이하면서다. 할아버지(정약용), 아들(정학연), 손자(정대림) 3대의 춘천 나들이길. 이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드디어 석파령. 예전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평평한 고갯마루다. 왼쪽으로 가면 당두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덕두원리다. 석파령은 조선 시대 춘천을 관장하는 부사(신임과 후임 부사)가 인수인계하던 자리. 산길이 너무 좁아 돗자리(席) 두 개를 깔지 못하고 하나를 둘로 잘라(坡) 사용하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의 신숭겸 장군 묘소. 특이하게 봉분이 세 개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의 신숭겸 장군 묘소. 특이하게 봉분이 세 개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신숭겸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表忠祠). 대구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신숭겸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表忠祠). 대구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숭겸이 죽은 자리에 조성된 순절단.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다.
신숭겸이 죽은 자리에 조성된 순절단.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다.

 

석파령 고갯마루에서 신숭겸 묘소까지는 13km. 삼악산을 오르고 또 석파령까지 오면서 힘이 상당히 빠진 상황. 이어지는 긴 코스가 아찔했지만 서두르기로 했다. 임도를 한참 걸어 내려가자 덕두원 마을이 나타났다. 

덕두원2리 마을회관에서 다시 길은 갈라진다. 춘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탈 수도 있고, 수레너미길을 넘어 신숭겸 묘소까지 갈 수도 있다. 새털처럼 가볍던 발걸음도 이젠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겁기만 했다.  

방동리 신숭겸 묘소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봉분이 세 개라는 데 놀란다. 도굴을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굴꾼들이 그냥 놔둘 리 있었겠는가. 잘 알다시피 신숭겸은 대구 공산(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죽었다. 후백제 견훤군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런 왕건은 신숭겸을 위해 자신의 명당 묏자리를 내주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무덤에 묻었다.

묘소를 둘러보면서 대구 팔공산 자락의 신숭겸 사당(표충사)을 들렀을 때가 떠올랐다. 지난해 팔공산 산행 후 들렀던 곳이다. 그곳엔 신숭겸이 죽은 자리에 묘의 형태를 갖춘 순절단(殉節壇)이 있다. 

그때도 그랬듯, 이번 석파령 옛길 산행 마무리도 신숭겸으로 끝났다.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이며, 공교롭게 석파령에서 오금을 저렸던 신흠 역시 평산신씨다. 

 

----------------글쓴이 이재우는?
외국어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스포츠조선과 비영리매체 팩트올에서 일했다. 일본 경제전문 매체 ‘재팬올’을 운영하면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산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산과 역사 그리고 경영에 대한 글을 쓰며 전국을 주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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